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21 사태 (문단 편집) == 진행 == 사건 직후 [[고양시|고양군]]과 [[파주시|파주군]] 일대에 1월 23일까지 통금령이 떨어졌다. 1월 22일 새벽 2시 25분에 제30사단 92연대의 잠정 1개 중대와 5분 대기조가 인왕산 하단의 세검정 계곡에 있던 바위에서 무장공비를 발견했다. 군에서 "나오면 살려준다"고 회유하니 결국 무장공비 1명이 수류탄을 들고 나왔다. 자폭할 수도 있었지만 수류탄을 그냥 떨어뜨리고 손 들고 나왔다.[* 꼬꼬무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때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하자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그가 바로 김신조 소위였다. 때문에 국방부 공식기록은 '생포'였고 세월이 흐른 후 책이나 언론에서는 '투항'이나 '자수'라는 용어도 쓰인다. 정황상 어느 쪽이나 맞는 말인 듯. 김신조는 아예 독립가옥에서 전투가 없었고 자신은 검문을 피하기 위해 무기와 장비를 모두 [[드보크]]에 묻어 두고 자폭용 수류탄 한 발만 들고 있었으니 자수라고 한다. 04시 15분경 김신조를 인계받은 방첩대는 그를 보자마자 '무기는 어디에 숨겨뒀냐?'고 물었다. 특공대원 25명은 김신조에게 직접 안내받아 전날 김신조가 매복했던 비봉 승가사 옆 200미터 지점에서 [[드보크]]를 찾아 침투 시의 일부 장비를 회수하였다. 이후에도 김신조는 정보 제공 등의 방법으로 공비 소탕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2016년 6월 28일 출판된 당시 방첩부대 특공대장이었던 [[이진삼]] 대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으로 전역. 국회의원 당시 국회에 출두한 현역 장성들에게 군번줄 착용 여부를 물어 화제를 모았다.]의 '별처럼 또 별처럼' 참조. 당시는 공비들이 엄청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때의 무장 공비 사건으로 김신조의 증언에 의하면 체포 후 자신과 함께 산악지대를 누볐던 남한 특공대원들이 북한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자신과 실력이 똑같았다고 한다. 김신조가 산에서 죽어라 뛰었는데도 특공대원들이 옆에 딱 달라붙어 뛰었다고 한다.[* 단 이때 김신조는 이전에 있던 산악고속행군으로 체력이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대한민국 국군과 교전이 시작되니 모두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부대가 '''완전히 와해'''되고, 끝내 전멸의 길을 걸은 점도 이들이 민간인에게 발각되거나 남한 군경과의 교전 가능성을 인지하거나 이에 대비한 훈련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련한 침투 전문가가 작전을 세웠다면 이런 돌발 급변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이에 대처하는준비나 훈련을 시켰을텐데, 북한의 124부대에는 이런 치밀한 작전 수립체계가 없었다는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